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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뷰

[도서리뷰] 싯다르타 / 헤르만 헤세

by 혜랑랑 2024.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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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오랜만에 도서 리뷰를 해볼까 합니다.
 



 그동안 읽은 도서들 중에 어떤 책이 소개하기 가장 좋을까 고민하다가 헤르만 헤세의 작품 싯다르타를 선정해 가져와봤습니다. 최근 들어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많이 읽었는데요, 그의 다른 작품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라는 작품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작가의 작품을 연달아 세 권 읽으며 작품 속의 유사성과 주제 의식, 그리고 헤르만 헤세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이해도도 올라갔던 것 같습니다. 독일 작가이지만 한국에서 더 사랑받고 있는 작가라고 하죠. 그만큼 한국인의 정서와도 결이 맞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도 헤세의 작품을 모두 재밌게 읽었기에 그의 작품이라면 무엇이든 추천하는 편입니다.


 
 본격적으로 싯다르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불교적 색채를 띤 소설입니다. 브라만의 아들이었던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행을 겪기도 하고 향락을 누리기도 하고 다시 가난한 삶으로 돌아와 나룻배를 몰기도 하며 결국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는 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책은 200페이지 내외로 그리 길지 않을 뿐 아니라 몰입도가 높아 앉은 자리에서 책을 다 읽었던 것 같습니다. 싯다르타의 여정을 방 안에서 따라가보며, 그가 느낀 경험, 가르침,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깨달음까지 모두 느낄 수 있었기에 몇십년을 걸쳐 이런 배움을 터득한 싯다르타에 비한다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가성비 좋게 배울 수 있고 언제든 즐길 수 있는 기회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책 전반적인 내용 자체가 싯다르타의 긴 여정으로 진행되기에 줄거리를 말하며 제 생각과 느낀점을 한꺼번에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싯다르타가 사문에 들기로 마음 먹고 깨달음의 순례길에 올랐을 때, 그에게는 그의 동반자와도 같은 친구 고빈다가 있었습니다. 고빈다는 싯다르타가 사문의 수행길에 오른다는 사실을 알고 기꺼이 그를 따라나서며 그와 함께 하는 친구였습니다. 사문에서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배고픔을 참고 인내하는 수행을 했고 그러던 중 고타마의 소문을 듣고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사문을 나갑니다. 고타마의 가르침은 소문대로 굉장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며 그의 사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싯다르타의 친우 고빈다는 고타마에 감명받아 고타마의 제자로 남기를 결정했지만 싯다르타는 그의 제자로 남지 않고 홀로 깨달음의 순례길에 오르기로 결정합니다.


 
 이때, 고빈다와 싯다르타는 오랜 동반자 생활을 청산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고빈다는 작품의 처음 싯다르타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뭐든 뛰어났던 싯다르타만이 본인과 어울리는 친우라고 생각했고 그와 평생을 함께 하는 반려로 남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그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습니다. 그러나 고타마의 가르침을 듣고 고빈다는 처음으로 싯다르타와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작중에서는 짧게 언급되는 장면이지만 저는 이런 고빈다와 싯다르타의 작별 장면이 인상깊게 남았습니다. 고빈다가 그동안 집착하고 애정을 가졌던 자신의 신념과도 같은 친구와 다른 길을 선택하기까지, 작품에서 고빈다는 비교적 싯다르타보다 깨달음이 덜한 인물로 묘사되었지만 싯다르타로부터 벗어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고빈다의 깨달음은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고빈다와 다른 길을 선택한 싯다르타는 마을로 내려가 순례를 하던 중 아름다운 카마라를 만나고 그녀를 선생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의 아버지인 브라만, 사문의 선배들, 고타마와 같이 고귀한 가르침을 위한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서 사랑과 인생을 배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싯다르타의 독특한 교육관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가르침을 청하고자 합니다. 길거리의 거지에게도, 돈 많은 상인에게도, 술집에서 일하는 카마라에게도 기꺼이 가르침을 요구합니다. 이런 태도는 우리의 인생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교수, 성공한 부자, 위대한 성인 등 지식인과 검증된 사람들의 가르침만을 선호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부자에게서는 돈을 불리는 법, 사람을 다루는 법, 사업을 확장시키는 법을 전달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수님에게서는 전공 지식을, 성인에게서는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 삶을 구성하는 전부는 아닙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해 우리 삶이 전부 그렇게 고상하고 지적이고 도움 되는 것들로만 채워지지는 않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실패한 사랑도, 일탈도, 탐욕도, 사소한 혹은 큰 부도덕도 우리 삶에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싯다르타 역시 수행자로서 인내하고 욕구를 없애는 법을 배웠지만 카마라와 육욕의 사랑을 나누고 카마스와미에게서 배운 장사로 세속적인 부를 축적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부도덕과 탐욕의 길로 빠져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과정에서 그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처음 마을로 왔을 당시 자신에게 무상으로 강을 건너게 해 주었던 뱃사공에게로 돌아가 그와 함께 욕망을 버리고 노를 저으며 수행하는 삶으로 돌아갑니다.

 아마 싯다르타의 세속적 경험이 없었더라면 그의 수행은 아직 다른 사문들의 수행 수준과 비슷하게 머물러있을지도 모릅니다.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은 너무나도 흔하고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싯다르타를 읽으며 나쁜 경험, 실패한 경험도 모두 내 경험이고 나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에 항상 고귀하고 성공의 경험만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깨주기도, 그것을 기반으로 더 분발하고 치열한 삶을 살게 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싯다르타는 또 하나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바로 육아의 경험입니다. 사실 카마라는 싯다르타의 아이를 임신했었고, 싯다르타가 잠적한 후 그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어느정도 자란 후 고타마의 위독 소식을 들은 카마라는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려 순례길에 오르게 되고 그 길에서 우연찮게 싯다르타의 거처를 지나다 그만 독사에게 물려 사망하고 맙니다. 홀로 남은 아이를 싯다르타가 거두고 싯다르타는 자신의 자식인 만큼 아이를 올바르게 기르려고 노력합니다. 아이는 카마라의 부와 권력 안에서 오만하게 자랐지만 그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의 투정을 받아주고 사랑으로 감싸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싯다르타에게 모진 말을 퍼붓고 결국 아버지가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노를 숨기기까지 하며 싯다르타의 품을 떠나버립니다.
 
 이 부분을 읽고 아무리 싯다르타라도 자식 농사 앞에서는 장사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출산을 하지 않으면 살면서 절대 느껴볼 수 없는 것이 모성애, 부성애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식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도 감이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젊은 나이이기에 미혼이고 아이도 없지만 언젠가는 저도 아이를 낳아 그런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기쁨, 슬픔, 사랑, 벅차오름 같은 감정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싯다르타는 제 가치관과도 굉장히 부합하는 소설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다양한 경험과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심하게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나거나 불법적인 행동이 아닌 이상 꼭 세상의 기준에 맞춘 옳은 경험만은 쫒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능력이 되는 안에서 여행도 많이 다녀보고 친구들 혹은 연인과 즐겁게 놀아도 보고 관심있는 학업 분야가 있다면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해보고, 때로는 남들이 보기에는 발전적이지 않은 취미에 매달려보기도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거나 내 전공과 전혀 관련 없지만 단순히 끌리는 공모전에 나가기도 해보면서 인위적이지 않게 내 마음이 이끄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심하게 일탈적인 행동을 하거나 음지에 손을 대보라는 뜻이 아니라, 사회에서 정한 기준, 혹은 내 삶, 커리어, 학업에 도움이 되는가를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을 한다면 결국에는 그것들이 내 인생을 받쳐주는 것 아닐까요.
 
 물론 현실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장의 진학, 학업, 취업, 알바 이런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해보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중요하기도 하고요.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 그것에만 매몰되어 강박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올바르게 사는것은 언젠가는 지치고 아무리 바른 사람도 가끔씩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바닥에 있는 나뭇가지를 걷어차지 않을까요? 저는 그저 딱 그 정도의 일탈이 현대 사회의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허용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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