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리뷰] 회색인간 / 김동식 소설집 1
No. 1 회색인간
오늘 리뷰할 책은 김동식 소설집 회색인간 입니다.
오랜만에 일도 없고 여가 시간이 많은 하루를 보내고 있는 요즘 문득 도서관에 가본지 오래라는 생각이 들어 간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습니다. 새로 산 책과는 달리 사람의 흔적이 느겨져 여기저기 필기 자국도 있고 접힌 부분도 적지 않았는데요, 평소였으면 거슬릴수도 있었을 이 흔적이 회색 인간에서는 오히려 어울렸습니다.
"회색인간"은 긴 장편이 아닌 짧은 단편 모음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책 제목 "회색인간"은 책을 펼치면 나오는 첫 단편 이야기의 제목이며 "회색인간" 에피소드를 읽는 내내 '디스토피아'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디스토피아, 유토피아의 반대말로 부정적인 암흑 세계를 그려낸 모습입니다.
회색인간은 갑자기 잡혀간 만명의 사람들, 그리고 하루에 주어지는 작은 진흙빵을 가지고 땅을 파야만 집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지저인간들, 그 사이에서 지구인은 죽어가고 그들은 점점 꿈도 희망도 즐거움도 욕구도 없는 회색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러던 중 노래를 부르는 한 여인, 그녀를 기점으로 화가, 소설가들이 살아남아 이 실태를 낱낱이 고발할 것을 약속하고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식량을 빼앗았다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회색 인간 세계에서, 일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절대 나누어 주지 않던 빵 조각을 예술가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오직 살아남아 이 사태를 그림으로 그리고 소설로 써내어 고발해주리라는 믿음 하나로 말입니다.
인간의 믿음만큼 덧없는것은 없지만 또 그것만큼 강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바로 다음 에피소드인 '무인도의 부자 노인'도 함께 생각해 보았는데요. 두 에피소드 모두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그 믿음 하나로 버텨갈 힘을, 인간 다울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으로 마음을 빼앗기고 돈을 빼앗기고 사람을 빼앗기곤 합니다. 믿음은 아마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과 감정이 있기에 인간은 조금 더 인간다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회색인간은 에피소드가 많기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의 일부를 골라 감상을 남기고자 합니다.
'신의 소원' 에피소드 중 한 장면입니다. 에피소드는 신은 12시에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말하며 한 사람에게 빛을 비추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은 사형수였고 처음 사람들은 그에게 극진한 대접을 해주다 그가 인류에게 해가 되는 소원을 빌 것을 우려해 12시가 되기 전 사형을 집행해 버립니다. 두 번째로 빛을 받은 사람은 장애인인 마르크스였고 그 역시 모든 장애가 치유되길 바라는 소원을 빌고자 했으나 그 역시 과거의 행적이 사람들에 의해 공개되고 여론에 의해 12시가 되기 전에 사망해버리고 맙니다. 세 번째로 선정된 평범한 남성 김군도, 부자였던 스크류지도 사람들의 선동에 의해 12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살해당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이 선정한 사람은 산골에 사는 소녀였고 마지막이라는 말과 산골에 사는 욕심 없는 소녀에 사람들은 소녀를 죽이지 않고 안심하지만 소녀는 그림과 같은 소원을 빕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인간처럼 똑똑해졌으면 좋겠어요.]
처음 이 문장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이만큼 무서운 소원이 또 있을까.
아마 사형수, 마르크스, 김군, 스크류지 중 누가 어떤 소원을 빌어도 이 소원만큼 인류에게 파급력을 주고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을 소원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것들이 인간처럼 똑똑해 진다는 것. 곧 생태계에서 인간이 더이상 우위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위에 서지 못한다 뿐일까. 인간보다 더 우월한 신체 능력을 가진 짐승들이 지능까지 가지게 된다면 인간은 한순간에 하등 생물로 전락해 버릴 것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우월해서가 아니라 다른 생물들이 열등해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은 정말 우월한 것일까. 아니면 우월하다고 자만하는 것일까.
아마 둘 다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합니다. 소설의 내용처럼 언젠가 짐승이 인간의 지능을 따라잡게 된다면 긴 인류중심 사회도 막을 내리지 않을까요. 그때가 정말 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손가락이 여섯개인 신인류' 에피소드입니다. 정부는 손가락이 여섯개인 인류가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계에서 신체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해 태아에게 부작용 없는 시술을 해 여섯개인 아이들을 탄생시킵니다. 해당 기간동안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손가락이 여섯개인 신인류입니다. 그러나 몇년 뒤, 해당 연구 결과는 거짓으로 밝혀지고 손가락 여섯개의 신인류 프로젝트는 중단됩니다. 프로젝트 기간 동안 태어난 아이들은 유리한 신체를 가진 신인류에서 한순간에 정부의 실수로 불행히 여섯 손가락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이에 신인류를 차별하지 말자는 여론이 거세지고 곧 모든 차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곤 합니다. 장애인 차별, 인종 차별, 성소수자 차별 등 모든 차별은 곧 차세대 신인류 아이들에 대한 예비 차별로 여겨져 심하게 지탄받았고 인류는 곧 모든 차별을 없애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차별이 사라졌을 때,
뭐야? 가능하잖아?
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우리 세상에 만연한 차별, 없애는게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했던 제 생각마저도 가볍게 부수는 발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니 어려울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합니다. 우리가 차별을 안하면 될일. 인류는 이 간단한 일을 하지 못해 아직 먼길을 돌아오고 있는것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 글을 본 일부는 "말이야 쉽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별을 하지 않는 것 역시 말 하나면 충분합니다.
'444번 채널의 동굴인들' 에피소드입니다. 어느날 444번 채널에 수상한 화면이 등장합니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동굴에 갇혀 생활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생중계되고 처음에는 설정인물 알고 흥미롭게 보던 사람들도 곧 심각성을 깨닫고 사람들을 구출하고자 합니다. 그 속에서 동굴 사람들은 저마다 생존을 위해 싸우고 종국에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식인까지 일삼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죽고 결국 나머지 한 명까지 사망하고 말았을 때, 사람들은 탄식하지만 이내 마지막 생존자는 일어나 화면을 끕니다. 사람들은 상황 파악을 하다 꺼진 화면을 보며 444번 채널, 그리고 동굴에 대한 관심을 꺼버립니다. 재밌는 것을 하는 다를 채널을 찾기 바쁩니다.
이 장면을 보고 한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딱 첨부한 사진의 장면을 보고 말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떠올리셨을 수도 있겠는데요. <트루먼쇼>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몇십년을 함께 한 주인공의 탈출을 누구보다 응원하고 숨죽여 보던 사람들이 트루먼이 세트장 밖을 나가자 잠깐의 환호 후 모두 채널을 돌려버립니다. 마치 이 채널의 유흥은 이게 끝이라는듯 말입니다. 영화를 볼 때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장면이었는데 이렇게 회색인간에서 비슷한 구도를 보니 반갑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에피소드 속 사람들과 트루먼쇼 영화 속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이 과연 다를게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볼 때, 재밌는 영화를 봤을 때, 인상깊은 결말에서 대부분은 감명받지만 감정은 잠시뿐 보통은 짧은 여운을 뒤로 하고 다시 일상으로, 새로운 재미로 복귀하곤 합니다. 어쩌면 회색인간 속 우리의 모습은 이미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짧게나마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는 회색인간이 되려면 멀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도 함께 말입니다.
회색인간은 디스토피아임과 동시에 유토피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역인 디스토피아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까요?
회색인간에서는 너무 빠르게 발전하는 인류를 비판하기도 하고 기득권층의 횡포를 풍자하기도 하고, 인간을 그 원초의 상태로 되돌리며 밑바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인간 사회가 얼마다 덧없고 망가지기 쉬운 것인지 보여줌과 동시에 인류 사회의 견고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처음 완독을 한 뒤 소설이 모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모순은 인류 사회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모순 덩어리인 인간 사회에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종이 한 장 차이, 혹은 공존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2023년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사회를 이미 유토피아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곳은 디스토피아가 된지 오래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그저 바라는 사람들이 대다수일지도 모릅니다.
제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10년 전 초등학생과 지금 초등학생이 배우는 것이 다르고 학교의 모습, 미디어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점점 서구와 비슷하게 개인주의적 성향을 띠는것도 느겨집니다. 우리 사회는 과연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중 어느곳을 향해 가고 있는걸까요?